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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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2003-10-07 11:10:37

안윤호 | mindengine@hanmir.com


필자는 아마추어 커널 해커이다. 최근에는 관심의 폭이 조금 넓어져서 인문과학과 생물학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의학과 의공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필자는 이전에 8비트 컴퓨터가 쓰레기통의 부품을 주워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어 낸 ‘실리콘 밸리 키드’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고 이들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내용을 적은 적이 있었다. 또 몇 달 전 컬럼에서는 사회주의자인 리 펠젠스타인홈브루 컴퓨터 클럽, 그리고 애플과 PC의 초기에 있던 대폭발에 대해 다루었다. 그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 애플 그리고 몇 개의 중요한 회사들은 점차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제1차 폭발이 8비트의 하드웨어를 통해 시작한 것이었다면 그 다음의 폭발은 CP/M, 비지칼크(VisiCalc), 로터스(Lotus) 1-2-3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초기의 마이크로컴퓨터의 구현은 대단한 성취였다. 그 이전까지의 컴퓨터는 대중의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컴퓨터가 퍼스널 컴퓨터의 형태로 보급되면서 최초의 스프레드시트인 비지칼크 같은 킬러 애플리케이션들이 출현함에 따라 사람들은 컴퓨터를 자신의 업무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로터스 1-2-3는 IBM PC의 보급을 다시 폭발시켰다. 이로 인해 컴퓨터는 수백 만대씩 팔리기 시작했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질적인 수준 향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들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나 많았다.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다룬 크린즐리의 책 제목은 「우연의 왕국(Accidental Empire)」이었는데, 그의 말처럼 아무리 보아도 우연의 힘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는 if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try...catch 같은 수단도 없다. 냉엄한 투쟁과 아픈 추억만이 밀려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는다. 역사가들은 그러한 일들을 기록한다.


목차

마이크로컴퓨터의 보급

이번 호에는 초기의 작은 승리를 거둔 PC 업계를 다시 한 번 레벨업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려고 한다. 초기 해커들이 자신의 열망(염원)을 납땜 인두를 들고 PCB(기판)에 담아 마이크로컴퓨터를 보급한 것이라면, 수준 향상은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촉발됐다. 요즘도 석유를 둘러싼 전쟁을 하고 있지만 1970년대에는 석유 파동이 있었고 냉전 시대였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종말관을 머리 속에 담고 살았다. 컴퓨터 자원 역시 국방에 관여한 부분이 많았고 냉전 경쟁에 일조했다. 1970년대의 인터넷을 비롯한 중요한 컴퓨터 발전은 많은 부분이 인류를 살해하기 위한 군비 경쟁의 일환으로 발전했다. 미국 국방성이 관여한 DARPA는 중요한 돈줄이었다.

마이크로컴퓨터의 보급은 사람들의 잠재의식 틈새 속에서 실리콘 밸리의 오타쿠 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리콘 밸리의 잉여부품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극히 반사회적인 사람들이기도 했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같은 책은 마이크로컴퓨터의 출산 기록이나 마찬가지다. 초기 8비트 해커의 대부분은 대학 중퇴자나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광적으로 8비트 컴퓨터를 개발하였다. 특별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으며, 마이크로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개발에만 몰두했다. 본격적인 운영체제나 고도의 하드웨어는 고려하지도 않았고 컴파일러도 없었다. 16비트 시절만 해도 어셈블러를 동원하여 개발하기가 예사였다. 로터스 1-2-3의 최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MS-DOS는 CP/M 운영체제의 클론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며, CP/M 역시 개리킬달이라는 컴퓨터 해커에 의해 급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컴퓨터는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 복사기 회사인 제록스(Xerox)는 앞으로도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절실하게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잘 경영되는 회사였으나 어쩌면 복사기 사업은 전망이 어두워질 것 같았고 무언가 대안을 찾고 있었는데 그 답을 컴퓨터에서 찾고자 했다. 이들은 미래에 종이 산업이 없어지거나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 대신 사람들이 컴퓨터 스크린만 읽는다면 1990년대에 가서는 회사가 파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했으며, 스탠포드 대학 근처의 스탠포드 산업 단지 내에 제록스 PARC(Palo Alto Research Center)를 세웠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우수한 연구진을 확보하면서 1970년에 문을 연 PARC는 고도의 두뇌집단으로 컴퓨터 역사에서 특이한 상황을 창조했다.


Xerox PARC

PARC(www.parc.xerox.com)의 목표는 10여년 후의 전자화된 사무실에서 적합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무기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교육만 받고도 직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일이 중요했으며, 다른 회사의 제품과는 차별성을 두고자 했다. 매우 독창적이고 인습 타파적인 인물들이 모인 PARC는 한 시대를 뛰어넘는 제품과 개념들을 개발했다. 그 중에서도 CSL(Computer Science Laboratory)은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제록스DARPA의 몽상가인 밥 테일러를 CSL의 책임자로 기용하였고 당시로는 최상급의 컴퓨터 인력을 확보했다. 밥 테일러ARPANET(인터넷의 전신)의 개발에도 깊이 관여했다. 제록스테일러의 인맥이 인재확보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테일러는 최고의 인맥을 발굴하고 이들을 분발시키는 역할을 맡았다(밥 테일러는 전공이 컴퓨터 과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였다). 테일러는 연구자들의 충돌을 막으며 의견을 듣고 가급적 단시일 내에 최상의 연구성과를 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행했다. 조직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 중간 관리층을 없앴으며 40명 정도의 연구원들과 20명 정도의 사무직원으로 PARC를 운영하였다. 모든 보고는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조처하였다. 하급 연구원도 없었으며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모아 연구결과를 서로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우기는 회의는 거의 아수라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테일러는 그들의 의견을 듣고 진전사항과 구상을 중재하고 조정하였다. 이러한 중재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여 한때 연구소는 테일러 연구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연구소는 광적으로 개발하는 연구자들과 이들이 마주치는 개발의 어려움으로 인해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소문도 돌았다.

밥 테일러가 최초로 발탁한 연구원은 앨런 케이(Alan Kay)였다. 앨런 케이는 널리 알려진 인물로써 재즈 연주자이기도 하며 애플매킨토시의 주요 개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스몰토크(smalltalk)'라는 최초의 객체지향 언어를 1972년에 CSL에서 구현하였다. 객체지향의 패러다임은 나중에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앨런 케이는 마소 2월호에도 소개되었다. 객체지향 언어의 시작은 데이터와 간단한 도입 프로그램을 같이 전송하는 케이의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다. 앨런 케이(Alan Kay)는 유타 대학에서 연구 중 시뮬라 언어를 접한 적도 있으며, 스몰토크에서 교육용 환경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과거에도 시도하였고 요즘도 진행중이다. 세이무어 페이퍼트마빈 민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적도 있다).

차별화의 목표와 자만심에 가까운 이상주의로 |CSL의 연구진은 텍스트 표시 위주의 환경을 벗어나기로 한다. CSL에서는 새로이 개발되는 컴퓨터에 회사 근처의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자인 더글라스 엥겔버트(Douglas Engelbart)가 개발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엥겔버트는 스탠포드 대학의 SRI에서 연구하는 학자였으며 마우스를 발명하였고 비트맵 그래픽과 윈도우의 개념을 개발하였다. 또한 하이퍼 텍스트의 연구로도 유명하다. 엥겔바트를 소개하려면 이 컬럼을 다 쓰고도 모자랄 정도인데, 엥겔바트는 몽상가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그 자신은 몽상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반문하곤 했다).

CSL은 마우스, 비트맵 화면, 페이지 편집기 등을 기초로 개선된 컴퓨터를 개발했다. 1973년 발표된 제록스Alto 컴퓨터는 이러한 개념을 거의 최초로 구현했다. WISWYG 에디터를 구현했고, 마우스가 상용화됐으며 GUI를 구현했다. 그리고 비트맵 그래픽스를 구현했다. 부분적으로 LAN과 분산 처리도 구현됐다. Alto는 유명한 Xerox Star의 원형이 된다.

같은 해 클라이언트/서버와 분산 처리의 개념이 PARC에서 발표됐는데, 이 해는 밥 멧칼프(Robert Metcalfe)이더넷을 발명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 CSL에서는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직렬 통신의 너무 느린 다운로드 속도에 질린 나머지 |멧칼프이더넷을 개발하고 말았다. 600dpi 레이저 프린터의 다운로드 속도는 이더넷으로 인해 15분에서 12초로 줄어든다. 이후 이더넷은 네트워크의 표준이 된다(멧칼프CSL을 퇴사한 후 3Com을 창업한다). 레이저 프린터는 1971년에 원형이 개발됐는데, 레이저의 라스터 스캔을 이용하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1974년에는 세계 최초의 그래피컬 워드프로세서인 브라보(Bravo)찰스 시모니의 팀에 의해 만들어진다. 찰스 시모니는 나중에 MS의 소프트웨어 제작에 CSL의 개념을 도입한다. 또한 CSL의 팀이 오버래핑하는 스크린 윈도우와 팝업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PDF와 포스트스크립트의 전신인 PDLs(Page Description Languages)도 이 때 정립된다. 1975년에는 GUI를 사용하는 퍼스널 컴퓨터를 일반에 공개하면서 아이콘과 팝업 메뉴가 선보였다(이 시기에 제1세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1976년에는 레이저 프린터가 상용화되었고 다음 해에는 상용화된 전자출판 시스템이 발표되었다. 또한 문자발생 셋트가 완전히 정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1978년에는 Notetake라는 가방 크기의 휴대용 컴퓨터가 완성된다. 1979년경에는 1000대 정도의 Alto제록스 내에서 이더넷 랜을 통해 사용되었고 500대 정도가 정부기관과 대학에서 사용되었다. 1980년에는 smalltalk-80이 발표되고 제록스인텔, 그리고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의 합의로 이더넷 표준이 만들어진다.

1981년에 PARC에서는 오늘날의 컴퓨터와 거의 비슷한 모습의 Xerox Star 8010을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워크스테이션의 선조라 부르는 Xerox Star의 탄생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나 아폴로 같은 워크스테이션들은 모두 스타와 그 선조 모델들의 영향으로 태어났다. 물론 8010 머신 역시 많이 팔리지 않았다. 이 컴퓨터는 분산 컴퓨팅을 지원했으며 다국어 지원이 가능했다. 클럭은 느렸지만 기능들은 요즘의 컴퓨터에 필적한다. 나중에 Xerox Star는 상용화될 기회가 있었으나 경영진은 그 기회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기술적 진보는 계속된다. 이런 일련의 개발을 보면서 우리들 머리 속의 컴퓨터 시계와는 거꾸로 돌아가는 PARC의 기술 시계가 놀랍기만 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 현재의 컴퓨팅 환경에 필요한 고급 개념은 일단 착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에서도 컴퓨터는 흔한 제품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컴퓨터는 텍스트 터미널의 작업환경이었다. Alto는 너무나 빨리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20년 가까운 시간차를 갖고 미리 개발된 제품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들은 연구성과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연구는 미래를 위한 기초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PARC에서는 레이저 프린터와 컴퓨터 네트워크, 그리고 GUI와 WISWIG이 가능한 워크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당시 경영진은 기존의 복사기 사업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했다. 나중에 Xerox Star 같은 컴퓨터가 시판되기는 했지만 기술의 활용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경영진들은 연구자들이 너무 이상과 자신들의 열정에만 치우친 사람들로 보였다. 만약 이 당시에 매킨토시 같은 GUI를 갖는 컴퓨터와 다른 8비트의 경쟁이 일어났다면 기술지향적인 관점에서 제트기와 프로펠러 전투기의 대결이 되었겠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어떤 경영 분석가들은 PARC가 많은 개발을 해놓고도 PC 시장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PARC의 분위기상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연구진은 실망했다. 연구진은 컴퓨터 업계에서 자신보다 못한 기술자나 과학자들이 창업에 성공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고 경영진의 방침에 실망한 연구자들은 참다못해 회사를 뛰쳐나가 스스로 창업했다. CSL의 연구는 지금 생각해도 중요한 기술들이었지만 당시에는 당장 상품화되지 못할 것으로 보여 비밀주의를 고집하지도 않았고 연구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창업을 통해, 또는 다른 회사의 핵심 인력이 되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이들은 모두 유명해졌다.

제1세대의 개척자들이 컴퓨터 산업의 기초를 마련한 바탕 위에 고급 기술들이 과감하게 적용되었다. 컴퓨터 산업의 박동은 CSL에서 만든 새로운 목표점들을 보면서 더 빨라졌고 미래는 경영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애플MS는 이러한 기술과 개념을 포장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는 자신의 것도 아닌 윈도우 개념 자체와 룩앤필(look and feel)을 빌미삼아 상대방을 서로 고소하기도 했고 때로는 협조하기도 했다. 두 회사가 생각하기에 GUI는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었고 미래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개발된 요소를 사용했다. MS애플도 WISWIG 인터페이스를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MS의 베이직이나 다른 회사의 소프트웨어들도 중대형기에서 아이디어와 코드를 빌려온 것이다. MS-DOSCP/M을 클론한 것이지만 CP/M 역시 다른 미니 컴퓨터의 코드를 베꼈다는 의혹이 있었다. 지적재산권이나 저작권, 그리고 회사의 기술이 비밀과 법률 서류에 둘러쌓이게 된 것은 컴퓨터가 큰돈이 되고 나서의 일이다. PARC의 개발은 그 후에도 계속되지만 중요한 개발자들은 계속 회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PARC의 사람들

어쩌면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당시의 한 대세였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반에는 이른바 스핀오프(spin off)라는 회사들이 출현했다. 모회사로부터 분리해 나오는 새로운 자회사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스핀오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스핀오프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 뛰쳐나온 사람도 많았다. PARC출신의 연구진은 매우 뛰어난 사람이 많았고 일부는 PARC의 분위기를 이어 나가고자 하였다. 물론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원래의 두목(?)격인 밥 테일러는 불간섭주의를 표방하였다. 연구진의 아이디어를 듣고 의견을 존중하면서 중재에 나서는 것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우선 하급 연구인력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상주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제로 최고급 인력들이 일손 부족으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픽 워드프로세서인 브라보를 만들 때조차 대학원생들을 인력이 아니라 실험 대상자들이라고 부름으로서 간신히 인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브라보(나중에 MS 워드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를 만든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는 이때의 경험을 「메타 프로그래밍 : 소프트웨어 작성방법」이라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모니는 프로젝트에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당초의 인원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비용만 더 들며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다른 프로그래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메타 프로그래머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메타 프로그래머는 작업 설명서만 작성한다. 메타 프로그래머는 사용자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 등을 피드백하며 프로그래머가 그 코드를 구현하는 것이다. 일반 프로그래머는 어떻게 보면 조금 독재와도 같은 이러한 방법은 시모니가 동구권인 헝가리 출신이라는 배경도 작용하였을 것 같다. 시모니는 제록스의 소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1인 독재를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시모니제록스의 개발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제일 먼저 제록스를 떠난 밥 멧칼프에게 상의한다. 멧칼프는 몇 개의 유망한 회사를 적어 주었고 시모니는 그 중에 맨 위에 있던 MS를 선택하였다. 시모니는 1979년 합류 당시 MS의 첫 번째 박사급 인력이었고 MS의 개발 방법론에 영향을 주었다. 몇 명의 엘리트가 만들어 낸 것을 메타 프로그래머의 지휘 하에 일반적인 프로그래머들을 동원하여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시모니의 지휘에 따라 80년대 초의 MS는 공장(factory)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메타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핵심 프로그래머는 빌 게이츠였다. 나중에 MS가 거대 조직이 되었을 때에도 평준화된 많은 프로그래머들과 몇 명의 메타 프로그래머로 조직된 것은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고 한다. 2002년까지 시모니MS의 수석 아키텍트로 일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회사를 떠났다.

제일 먼저 제록스를 빠져 나왔던 멧칼프는 상당한 카리스마와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3Com을 1979년에 설립했으며, ARPA NET의 구축에 관한 내용으로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네트워크 하부구조인 이더넷을 만들었다. 3Com을 만든 후 이더넷을 LAN의 표준으로 만들었고 그 후에는 3Com의 CEO로 제품을 팔러 다녔다. 자신이 만든 이더넷에 열정과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더넷 제품을 열정적으로 판매하였다. 약 11년 동안 3Com의 회장 생활을 한 후 1990년에 은퇴한 뒤 컬럼과 강연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강연에서 자신의 행운은 이더넷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더넷을 열심히 팔러 다닌 데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멧칼프는 매우 카리스마적이며 독단적이고 전투적이고 실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최근 그의 인터뷰(http://www.thetech.org/revolutionaries/metcalfe/)를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스티브 잡스멧칼프의 옹호자이기도 했는데, 잡스와 비슷한 양상으로 멧칼프는 자신이 창립한 회사에서 나중에 영입된 인사들에 의해 강제로 퇴출되는 경우를 당했다. 고집이 세고 독단적이며 전횡을 휘두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존 워녹PARC에서 포스트스크립트의 전신에 해당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PARC를 나와 벡터를 이용하는 포스트스크립트 언어를 만들었다. 존 워녹은 자신의 상관과 함께 PARC를 떠나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자신들의 개발 제품을 상용화하자고 2년이나 회사에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쇄용 워크스테이션을 만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소프트웨어와 폰트를 판매하는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어도비(Adobe)라는 이름은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보이는 거대한 절벽 이름을 따서 지었다.

프린터 컨트롤러를 개발하기 위한 어도비의 노력은 매우 거대한 도전이었으며 당시의 느린 하드웨어를 감안하면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개발이 진행되는 도중 1984년에는 매킨토시를 만드는 애플애플 III, 리자, 매킨토시가 모두 판매부진으로 실패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었다. 깜찍한 맥의 외관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GUI를 강조하고 차별성 광고를 내기는 하였으나 다른 업체들도 모두 GUI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로터스, 비지코프, MS, 디지털 리서치 그리고 제록스까지도 GUI를 위한 제품들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애플은 이러한 경쟁자들을 물리칠 새로운 제품이 필요했는데, 1984년에 HP에서 레이저 프린터를 선보였다. 스티브 잡스는 프린터의 글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식자기 수준의 글씨를 보여줄 수 있는 어도비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하고 어도비의 회사주식 15%를 매입한다. 당시만 해도 계속 경영적인 실수를 하고 있는 잡스어도비에 대한 투자를 거울삼기를 바라면서 회사의 이사회는 투자를 승인하였다. 6년이 지나고 주식은 8900만 달러가 되었으나 정작 애플은 자사의 포스트스크립트 카드를 쓰고 다른 회사는 어도비 시스템의 컨트롤러를 사용했다. 결과는 타사 제품이 애플의 제품보다 7배 정도 빨랐다고 한다.

존 워녹은 회사의 매출규모가 많아져도 경영을 고수했다. 빌 게이츠에게는 시모니가 있었으며 메타 프로그래밍으로 일을 해 나가는데 반해서 워녹PARC에서의 방법을 그대로 도입했다. 영업은 최우선 요소가 아니었으며 최상의 프로그램을 적절히 개발해 나가는 일이 최우선시되는 회사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고집불통인 회사는 애플과도 사이가 멀어지고 싸우기도 하고 빌 게이츠의 제안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 싸우고 다시 화해하기를 되풀이했다. 폰트와 그래픽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이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주도권과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도비PARC 방식을 고집하기도 했지만 살아 남아서 훌륭한 회사로 남았다.


작은 역사라는 것

CSL의 식견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록스 자체에서는 실용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시 경영층의 판단이 더 상식적이었을 수도 있다. 너무나 빠르게 PC 혁명이 진행되어 제록스가 PARC의 결과를 이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몇몇 회사는 필사적으로 PARC의 결과를 이용하여 성장했다. 제록스 자체도 최초의 건식복사기술(xerography)을 상용화하려던 1950년대에는 아무도 복사기 시장이 커다란 시장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않던 개발을 감행했다. 제록스는 모험 기업으로 출발했다. 불과 얼마 후 제록스는 대기업이 되었고 PARC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RCA가 50년대에 액정의 연구가 브라운관 판매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개발을 중지한 일이나, IBM에서 386의 출현이 자사의 미니 컴퓨터 판매에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들이 비슷한 맥락을 보여준다.

아무튼 우연하게 결집된 수십 명의 인원들이 컴퓨터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개발한 것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제록스는 90년대를 대비하여 70년대에 개발을 하였다. 이는 어쩌면 올바른 예측이었는지도 모른다(1970년대에 워크스테이션과 GUI라니 너무 앞서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개발진들과 사업가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기회가 생기면 열정적인 사업가와 개발자들은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들은 자신을 판돈 삼아 배팅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그래서 또 바뀐다. 역사에는 if 구문이 없다. 사건들이 연습 없이 계속 일어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연과 운(運)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안목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희뿌연 안개 속의 빙산을 발견하며 항해하는 것처럼 윤곽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윤곽은 뚜렷해지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은 알 수 없는 요소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컴퓨터 산업의 판돈은 크고 결과는 해봐야 아는 것이며 뚜렷한 룰은 없다. 이기면 많은 보상이 있으나 잘못되면 포인터는 Null을 가리킬 것이다. 때때로 컴퓨터 산업의 태풍의 눈은 소심한 사람은 견뎌내기 어려운 무서운 국면이 있다. 열정, 광기 같은 요소와 안목의 결합은 어울리지 않게 보이지만 컴퓨터의 경쟁적 역사에서는 언제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엥겔바트의 아이디어는 그의 연구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각과 사고를 연장하는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PARC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모아 모든 초기 제품을 보여 주었다. 활용하지는 않았으나 연구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인 GUI와 네트워크, 그리고 OOP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자신들의 꿈을 구현하려 애를 쓰던 몽상가들은 요즘은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엥겔바트는 "디지털 기술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Digital technology could help make this a better world. But we’ve also got to change our way of thinking)"고 말한다. 이에 부응하듯 앨런 케이는 교육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바꾸어 보려고 했고 멧칼프도 최근에는 이와 비숫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30년 전에 있던 작은 혁명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서 출발한 것이다. 컴퓨터 산업은 그 혁명이 제시한 타임머신에 홀려 한번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 GUI와 WISWYG은 하도 산업계의 화두로 많이 사용되어 별로 참신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놀라운 생각이었다. 지금은 사물과 생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화두를 만질 때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꿀 때가 된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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