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브루 컴퓨터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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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브루 컴퓨터클럽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4)


역사에 대해 필자를 놀라게 하는 일중의 하나는 시대적 정신이나 기운에 따라 사람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준비된 00” 이런 것이 아니다. 변화와 혁명의 시기에는 힘이라는 것이 있다. 소위 풍운아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며 <역사적 기운>이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모든 변화를 이끌어 내거나 만든 것이 아니다.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그들이 가리키는 위치에 우연히 바람이 불어주면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특정한 시기에 등장해 주어야 하고, 없으면 때로 발명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전에 없던 기계들이 나타났다. 마이크로프로세서 가 갑자기 신생기업인 인텔에서 발명되고 TI모토롤라를 비롯한 다른 반도체 회사에서도 비슷한 것들이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 디지털이나 컴퓨터는 사람들과 별로 상관이 없는 기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퍼스널 컴퓨터를 아주 좋아했고 그 이유 역시 다양했다.

사람들이 열광하자 우리가 알고 있는 디지털의 영웅들이 나타났다. 기이한 인연으로 이들은 캘리포니아의 한 장소에서 만났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되었다. 이들이 퍼스널 컴퓨터를 규정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집에서 컴퓨터를 자작해 보자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 이 나타났다.


목차

6502 CPU

Apple II 는 컴퓨터 역사상 최초로 대량 판매된 퍼스널 컴퓨터이다. 마치 자동차의 역사에서 T형 포드와 같다고나 할까? 그 중심에 6502 CPU가 있다. 6502 는 수천 개의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진 작은 CPU로 클럭은 1MHz 정도의 64KB 어드레스 공간을 갖고 있었다. 독자들 중 상당수가 Apple II 컴퓨터를 직접 본 적도 드물 것이다.

애플 컴퓨터 가 가난한 하드웨어 해커들의 손에서 탄생해 거대한 기업이 되기까지 베스트셀러인 Apple II 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는 이 컴퓨터의 클론 업체로 출발한 작은 컴퓨터 회사가 삼보컴퓨터가 되었다. 삼보 컴퓨터는 그 이전에 샤프pc8801을 클론했는데 별로 팔리지 않았다. ) 아름답고 하얀 플라스틱 케이스의 Apple II 를 보면 필자는 지금도 흥분하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용하지도 않는 Apple II 의 보드를 조심스럽게 모셔 놓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으나 중요한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8비트 CPU를 갖고 보드를 만들고 기계를 개발하던 사람들은 이제 업계에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벤처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직종을 바꾸고 은퇴했기 때문이다. 필자처럼 아마추어로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은 예외에 속한다. 하지만 몇 명의 골수 개발자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얼마 후에 나온 16비트 IBM PC XTAT로 시작한 그룹 역시 회사의 중역이 되었거나 사원들을 지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은퇴한 사람도 많다. 80386 으로 시작한 사람들이 곧바로 뒤에 나타난다.

필자는 당시에 세운상가 키드였기 때문에 세운상가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당시는 담배 연기와 납땜 연기가 뒤섞여도 만능 기판에 직접 배선을 하면서 행복해 했던 시절이었다. Apple II 한 대를 사려고 몇 개월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였고, 컴퓨터 한 대가 망가지면 연구실의 실험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학원 밖에서는 온통 독재타도 데모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과 화염병, 그리고 “군사독재 물러가라”의 구호들. 이윽고 최루탄 냄새가 나면 눈이 따갑고 눈물이 났었다. 세운상가는 종로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무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386이었다, 386 이전의 세대들은 다른 문화권에 속했다. 왜냐하면 나이가 30대 근처가 되어서야 컴퓨터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소한 유틸리티들과 거의 실용적이라고 볼 수 없는 업무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소프트웨어 하우스들이 생각난다. 3∼4년씩 미래의 희망을 자산으로 열심히 개발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시스템 하우스들도 있었다. 게임기를 클론하기도 하고 장비의 락을 풀기도 하지만 개발을 열심히 하기도 하고 실력도 있었던 회사들을 기억한다. 열정이 아니라면 오실로스코프 를 켜고 디버거와 역어셈블러를 손수 만드는 고생을 누가 하겠는가?

BIOS 덤프를 다 뒤지고 모니터 프로그램으로 기계어를 직접 입력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80년대에도 명문 학교를 다니다가 공부를 집어치우고 세운상가 에 빠져버린 사람들이 중고부품 가게 앞에 앉아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정보화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보화는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급진전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일들이 천천히 진행되었다. 컴퓨터의 발전이라는 큰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그 파도를 잘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면서 하드웨어 해킹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해킹 자체의 희열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재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이미 다 만들어져서 나온다. 소박한 하드웨어 해커를 질리게 만들만큼의 매뉴얼과 명세서, 인터페이스 규격에 또 규격. 대기업과 엘리트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규격들. 철저한 규격화 사회가 된 것이다. (예전만큼 간단한 일로 큰 파장을 만들 기회는 별로 없을지 모른다.)

What’s where in the apple?

녹색 표지에 사과 그림이 있는 책은 애플 컴퓨터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설명한 책이다. 애플 컴퓨터 안에 있는 모든 하드웨어적 기능과 소프트웨어적 능력을 끄집어내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 애플 컴퓨터 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숨은 기능을 찾아내려면 이런 책을 보면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책의 신판이 채 나오기도 전에 CPU는 몇 배 빨라지고 칩셋은 바뀔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매뉴얼도 수십 메가바이트의 pdf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힘을 쏟을 타깃이 바뀐 것이겠지만 자동차의 역사에서 차의 발명가들과 공장의 직공만큼의 격차를 느낀다면 잘못된 것일까? 이런 것이 싫다면 불안정하긴 하지만 독립적인 마이너 차량 제작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림1>사람들이 애플컴퓨터 안에서 찾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직공이나 고용인이 되는 일을 불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컴퓨터를 연구하면서 행복해질 일은 없을까? 원시적인 에너지와 열정으로 컴퓨터를 즐길 방법은 없을까? 아니면 방향을 조금 바꾸어 좀 더 고급스러운 개발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긴 당시에도 이 책의 표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IBM PC가 새로 발매된 것을 기억한다. 패러다임은 더 혼란스러웠고 루머가 난무했다. 순박한 개발자로 남는다는 것이 꽤 어려운 일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해커

w:Steven Levy 의 책 해커(Hackers :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 - 국내에는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으로 사민서각에서 출판)는 옛날 책이지만 거의 고전이 되었다. 레비는 책에서 해커의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정사(正史)가 아니며 그들은 컴퓨터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무대 뒤의 천재들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영웅들을 가져다준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레비의 분류에 따르면 첫 번째 세대의 해커들은 컴퓨터 세계를 개척하며 그 행위 자체를 최고의 목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두 번째 세대의 해커는 컴퓨터라는 마술을 사람들에게 공유시키기 위한 활동을 주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세 번째 세대의 해커들은 소프트웨어의 해커들로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세상에 팔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레비의 분류에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며 해커라는 이름도 레비의 책에서 정의한 용도와 이미 다르게 쓰이고 있다. 하지만 레비의 분류는 컴퓨터 업계의 추세와 에너지를 반영하고 있다.

레비의 두 번째 분류에 해당하는 하드웨어 해커들은 70년대의 퍼스널 컴퓨터 붐을 하드웨어적으로 주도했다. 이들은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변화의 기운을 반영하였다. 50년대의 냉전 분위기와 군산복합체의 대두, 핵전쟁의 위협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거치면서 히피운동과 반전운동, 그리고 지배 계급에 대한 불신과 반대를 위한 투쟁이 있었고, 2세대의 해커들의 행동 강령은 이러한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섞였다.

70년대 초에 인텔 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가 개발된 지 2∼3년 후 간신히 범용적인 능력을 갖게 된 8080 등이 발표되었으나 주 용도로서는 제어장치에 사용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주된 용도는 간단한 계산기나 컨트롤러였다. 이들을 진지한 컴퓨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60년대의 PDP도 빈약한 컴퓨터이긴 했지만 8비트의 장난감 같은 프로세서로 무엇인가 쓸만한 것을 만드는 것은 실제의 컴퓨터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일로 보였다. 해커들의 열정만으로 설계하고 만들어낸,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던 설계 목표였던 마이크로컴퓨터 (또는 퍼스널 컴퓨터)문화의 중심에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 )과 피플즈 컴퓨팅, 그리고 리 펠젠스타인(Lee Felsenstein)이 있었다. 펠젠스타인을 비롯한 몇 명의 정치적 이념을 가진 해커는 컴퓨터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 를 이용한 퍼스널 컴퓨터는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러한 일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림2>Homebrew Computer Club


리 펠젠스타인홈브루 컴퓨터 클럽

명백한 것을 취하고 그것을 단순화하라 (Take the obvious...and simplify it!). 리 펠젠스타인은 1945년에 유태계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가정생활은 불우했으나 정치적 관심은 높은 집안에서 자랐다. 불행한 가족생활에서 도피하기라도 하듯 어린 펠젠스타인은 병적으로 전자 공학에 집착했다고 한다.

전자 공학과 공상 과학에 심취해 버클리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으나 60년대의 교내 정치활동에 관여한 후 얼마 뒤 지하신문에 ‘전투적인 편집자’로 참여한다.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정치 활동으로 기소당하기도 했으며, 졸업은 72년에야 가능했다.

1973년부터 펠젠스타인이 참여한 메모리 공동체(Community Memory)는 제 3자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사람들이 기탄없이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통신 시스템으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기증받은 구형 컴퓨터에 단말기를 연결해 사람들끼리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메모리 공동체의 실험에서 펠젠스타인은 컴퓨터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도구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초만 해도 가장 저렴한 컴퓨터가 소형 컴퓨터 기종인 PDP 시리즈도 수만 달러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컴퓨터를 갖고 싶어 했으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펠젠스타인은 컴퓨터를 이용한 자유로운 네트워크 건설에 필요한 개인용 컴퓨터 개발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을 이끌었다. 홈브루라는 말은 '집에서 만든' 또는 '자작의'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70년대는 반체제 운동과 히피 문화 속에서 컴퓨터 문화 역시 정치사회적 특성을 강하게 보였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진행은 75년부터 77년까지 펠젠스타인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으나 구성원들은 엔지니어링 측면이 강한 그룹이었다. 이들은 모두 컴퓨터의 제작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들로부터 23개의 컴퓨터 회사가 탄생했다. 이들 중에는 지금의 Doctor Dob’s Journal 같은 잡지사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이었던 스티브 잡스 워즈니악애플 같은 회사도 포함된다.

오스본 컴퓨터크로멤코 같은 회사도 있었다. 펠젠스타인프로세서 테크놀로지사를 통해 자신이 설계한 SOL 컴퓨터를 판매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마이크로 컴퓨터 회사들은 폭발적인 판매 증가를 경험했다. 이로 인해 하드웨어 해커들은 대부분 부유해졌으나 상업적인 성공보다는 해커로서의 방식에 충실했다. 얼마 후 폭발적인 성장이 끝난 후 이들은 하나 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이들 하드웨어 해커의 시대를 거치면서 컴퓨터는 수많은 곳으로 파급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일은 급작스럽게 범용 마이크로프로세서 가 발표된 지 3∼4년 만에 진행됐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으며, 그리하여 컴퓨터는 사람들의 손에 닿을 수 있게 됐다.

하드웨어 해커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펠젠스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메모리 공동체를 유지하려 했으나 메모리 공동체 역시 해체됐다. 컴퓨터가 갑자기 흔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이들은 통신을 위한 단말기 같은 것을 필요로 했었고 충족되었다. 이념과 정치적인 이상이 개제되기는 했으나 역시 컴퓨터는 컴퓨터인 것이다. 컴퓨터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데 이용된다고 생각을 하건,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건 그것은 이념이다. 컴퓨터가 흔해지면서 둘 다 가능한 일이며 사람들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동시대의 초기 모임이었던 '피플즈 컴퓨터'의 창간호 표지설명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컴퓨터는 대부분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데 쓰인다. 
민중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가 왔다.
우리는 필요하다… 


변화의 요소들

아무튼 70년대 컴퓨터 폭발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몇 가지의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MITS 라는 회사에서 최초의 조립 키트형 마이크로컴퓨터인 알테어를 발매했으며 폭발적으로 팔렸다. 이 컴퓨터를 소개한 파퓰러 엘렉트로닉스 잡지도 50만부 이상 팔렸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도 이 현상을 놀라운 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컴퓨터를 갖고 싶어 했다. 이 당시 컴퓨터는 플로피 디스크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용성은 사용자 스스로 부여해야 했다. MITS 의 기계들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도 사용되었다.
  • 애플과 코모도어, Radio Shack 같은 회사에서 완제품 컴퓨터를 판매했고 개인용 컴퓨터는 미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산업이 되었다. 홈브루 클럽은 이러한 일을 위한 선구적 작업을 진행했고 하드웨어 해커들은 자연스럽게 업계에서 잊혀졌으나 컴퓨터 산업은 초거대 산업이 됐다. 애플은 자기집 차고에서 조립한 나무상자의 컴퓨터를 클럽의 사람들이 사겠다고 줄을 서면서 주문이 늘자 컴퓨터 회사가 된 것이다. 몇 억불의 기업이 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성숙한 미니컴퓨터의 문화와 기술 풍토가 있었다. 적어도 10년을 선행하여 개발된 경험이 있었다. 어셈블리어나 언어같은 것들은 미니컴퓨터에서 성숙한 수준으로 이미 발전해 있었다. 비록 프로세서와 극히 간단한 모니터 수준밖에 없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과 4-5년 만에 미니컴퓨터의 기술적 DNA들은 모두 마이크로의 세계로 옮겨갔고 IBM PC 가 나타났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필수적 요소로 변하는 기간도 잠깐이었다. LED와 토글 스위치의 기계에서 정말 컴퓨터 같은 것으로 변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요소가 또 있었다. 이런 마이크로컴퓨터 혁명, 정보의 혁명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은 각국의 정부는 이런 변화를 지원하거나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운상가 키드(80년대에는 세운상가 에서 컴퓨터 보드를 복제하고 판매했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면 기술에서 무언가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다 해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그 무엇을 지금도 찾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도 새로운 펠젠스타인, 새로운 홈브루 컴퓨터 클럽 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변화의 큰 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사람들이 원하던 그 무엇이 나오고 이 바람은 오래 축적된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컴퓨터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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