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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프로세서의 전쟁(5)


예전에 LSD 구루 티모시 리어리는 “퍼스널 컴퓨터는 미래의 LSD다” 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당시에는 통신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로 할 일도 별다르게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퍼스널 컴퓨터에 빠져 들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사람들이 마리화나와 LSD 같은 약물에 빠진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이들 항정신성 약품의 하위문화는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반면에 컴퓨터의 문화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약보다 더한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1970년대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형태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오늘날의 퍼스널 컴퓨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콘솔이 없이 텔레타이프나 단말기를 붙이고 사용하는 형태였다. 두 번째는 매우 생소한 모습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유닉스 서버에 터미널로 접속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모습도 아니다.

다만 컴퓨터의 용량이나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에 퍼스널 컴퓨터는 비디오 모니터와 키보드를 단독으로 갖고 오늘날의 펌웨어에 해당하는 모니터 프로그램과 운영체제를 갖추었다. 운영체제는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플로피 디스크에서 부팅하거나 아니면 카세트 테이프에서 부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초기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빠져 들어간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워낙 하드웨어가 빈약했기 때문에 4K 베이직이나 8K 베이직으로 무엇을 할지도 의문스러웠다. 포트란이나 C 언어가 64K 메모리를 갖는 애플에 올라가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일들을 해냈다. 4K 와 64K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궁금해 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운영체제만큼이나 복잡한 모니터 프로그램도 16K가 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은 어셈블리어로 코드를 줄여놓게 되어 가능해졌다. 바로 코드 버밍이라는 기술때문이다. 코드 버밍을 하는 이유는 기계에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적은 메모리는 비용절감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했지만 하드웨어도 보잘 것이 없었다.


목차

마이크로컴퓨터 시대의 시작

이유는 잘 모르지만 컴퓨터에 새로운 흐름이 생겼다. 그 새로운 사조는 엘리트가 아닌 일반 사람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메인 프레임이나 미니컴퓨터들이 마이크로보다 확연히 더 좋다고도 볼 수 없었다. 조금 더 나은 것은 분명했지만 말이다. 지난 호에도 밝혔지만 MITS에서 처음 나온 마이크로컴퓨터는 모니터와 키보드가 없었고 타이프라이터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MITS알테어 8080을 보고 PDP-1이 원하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좋아했다. MITS가 주문을 받아 몇 개월씩 밀린 주문을 처리하던 도중에도 많은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나타났다. 너무 많이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는데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나온 컴퓨터들도 많았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높았기 때문에 다들 잘 팔렸지만 곧 대부분의 회사들은 정리되었다. 별로 절박하게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심리적인 것도 있었다. 필자도 컴퓨터를 갖고 싶다는 심리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 당시 퍼스널 컴퓨터를 구매한 사람들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았다. 자신의 업무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고 , 통신도 안 되는 이 기계의 사용처를 발견하는 것이 당시의 웬만큼 단순한 하드웨어 설계보다 더 고난도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게임 역시 놀랄 만큼 단순했다.

The Hotbit(MSX), developed by Sharp

온갖 컴퓨터의 모임, 그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애플, 탠디, 코모도 같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계들과 [w:BBC Micro|BBC 마이크로]]와 같은 영국제 컴퓨터 그리고 샤프에서 만들어진 일본 제품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나마 나중에 나온 제품들이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삼성과 금성(현재 LG전자)에서 자체 브랜드의 제품을 그리고 나중에는 대우에서 라이센스 MSX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자료를 보관하는 장치는 카세트 테이프였다. 요즘의 독자들은 하드 디스크에 익숙해져서 자료보관 = 디스크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하드디스크는 80년대 중반은 되어야 나타난다. 그 전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그리고 그 이전에는 카세트 테이프 인터페이스가 있었다. 그보다 전에는 종이테이프가 있었다. 종이테이프는 말 그대로 종이에 뚫린 구멍을 읽어 데이터를 판독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으로 4K만 되어도 상당히 큰 뭉치가 되며 습기에도 약하고 끊어지면 투명 테이프로 이어 붙여야 했다. 유닉스의 초기 모습도 별 차이가 없었다. 마이크로컴퓨터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의 유닉스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메모리 역시 64K 정도였으니 몇 년 뒤의 애플과 별 차이도 없었다.

CP/M-86

그 당시 만들어진 이상한 모습의 유틸리티들이 오늘날에도 예전의 이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모습은 80년대로 접어 들어갈 무렵 거의 확정된다. 70년대 중반의 놀라운 작품이라면 MS-DOS의 전신인 개리 킬달(Gary Kildall)CP/M이 있었다. 이 제품의 컨셉은 기술적인 면도 있었지만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곧 중요한 저장장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한 킬달의 안목에 의존했다.

당시의 디스크라는 단어는 8인치 디스크를 말하며 5.25 인치는 더 작다고 해서 디스켓이라고 불렀다. 개리 킬달은 디스크가 가장 저렴한 매체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DOS 라는 이름은 Disk Operating System을 줄인 것이었다. 디스크로 조작되는 시스템이었다. 기왕 만드는 운영체제는 여러 가지 하드웨어에서 운용되므로 BIOS(Basic Input Output System)도 만들어서 기계마다 다르게 만들었다.

클론 기종의 탄생

그러나 대부분의 회사들은 CP/M이나 DOS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얼마 동안은 아주 잘 팔렸다. 중소 메이커들이 선전함에 따라 대기업들도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소 메이커라고 불리기도 힘든 작은 회사들, 다락방이나 자기 집의 차고에서 회사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탠디(Tandy)를 만든 라디오샥(RadioShack같은 회사는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말 덩치가 큰 샤프나 일본의 대기업들도 뛰어들었다. 애플은 차고에서 만들어진 신생기업 정도가 아니라 전파상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파상들은 아주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 보드의 클론 이후 애플샤프의 기종들을 클론했다. 삼보컴퓨터도 초기에는 pc-8800을 클론했다.

그 첫 해에는 제품이 거의 팔리지도 못했다. 겨우 몇 대가 안 되는 실적을 보였을 정도다. 애플을 클론하면서 삼보컴퓨터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운상가에는 클론들이 넘치고 있었다. 세운상가의 분위기는 당시 활력에 넘쳐났다. 고부가가치 산업인데다가 일부 영세업체는 전자 오락기 등을 조립하고 남은 부품이나 재활용될 부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해 조립하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추억이 담긴 시절이었다.

각국 정부의 대응

한편 미국은 나름대로 광기어린(?) 컴퓨터 시장이 형성되었으나 다른 나라들은 달랐다. 미니컴퓨터나 메인컴퓨터를 만지던 종사자도 적었고 무엇보다도 컴퓨터의 활용 능력 (computer literacy)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나름대로 정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라들 저마다 정확한 방법은 몰랐으나 정책은 세워야 했다. 미국 역시 스푸트닉 쇼크의 일환으로 DARPA의 프로젝트들이 개발되며 컴퓨터 수요가 많이 늘어났으니 정책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대형 컴퓨터의 클론에서 미국을 많이 따라가는 추세였으며 미니컴퓨터 역시 상당수 보급되어 있었다. 마이크로컴퓨터는 대기업에서 충분히 설계하고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비싸기는 했지만 호기심 많은 젊은 층들이 꾸준히 사주기도 했다. 대기업 초임의 몇 달치에 해당하는 가격인 데도 PC-8801 같은 퍼스널 컴퓨터는 그나마 꾸준히 팔리고 있었다. 얼마 후 샤프mz-80 같은 기종들이 나오고 나중에 MSX가 나오면서 가격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 다음은 곧바로 전 세계적인 IBM PC 호환 기종의 득세가 이어졌다.) 일본의 아마추어나 실제 종사자들의 경험곡선은 결코 낮지 않았다.

영국은 BBC의 'Computer Literacy Project'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일반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보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The Mighty Micro라는 다른 방송프로그램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기획자는 경제와 산업 라이프 스타일의 대 변혁이 올 것을 예측했다. 프로젝트의 일부인 ‘The Computer Programme’라는 코너에서 그래픽, 프로그래밍, 텔레텍스트 ( 예전의 BBS같은 통신 시스템을 당시의 용어로 텔레텍스트라고 불렀다)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시험할 기계가 필요했다. 별로 쓸 만한 기계를 납품할 영국 업체를 찾기가 어려웠으나 결국 Acorn 이라는 회사가 BBC의 용도에 맞는 컴퓨터를 개발해서 납품했다.

BBC 마이크로아톰프로톤 같은 기종들로 시작된 시리즈는 몇 년 동안 진행되었다. [w:BBC Micro|BBC 마이크로]]가 많이 팔린 이유는 간단했다. 특별한 수요가 없는 가운데 교육용 컴퓨터는 가장 중요한 수요시장이었다. 학교에서 컴퓨터 활용수업을 이 기종으로 진행했다. 프로그래밍도 가르쳤다. [w:BBC Micro|BBC 마이크로]]라는 제품 역시 BBC의 기준을 완전히 만족시킨 것은 아니다. BBC 역시 선정시간에 쫓기다보니 Acorn 컴퓨터의 제품을 선호한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의 우리나라의 삼성이나 금성의 제품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퍼스널 컴퓨터 개발 열기는 꽤 높았다.)

얼마 후 수요가 급감하여 회사가 어려워지자 에이콘은 32비트 퍼스널 컴퓨터를 개발하였다.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이때 독자적으로 개발된 마이크로프로세서ARM(Acorn Risc Machine)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되었다.

애플 II 컴퓨터

이와 견주어 미국은 잘 나가는 애플 II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컴퓨터를 무척 좋아했다. 맥이나 아이폰처럼 사람들을 홀리는 아이콘 같은 그 무엇이 있었다. 대기업인 TI나 다른 업체들보다 훨씬 많은 사용자를 가지고 있었다. 가격이 싼 것도 아니었으나 성능이 쓸 만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플로피조차 없는 모델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경우 가정용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서 데이터를 저장했다. 미국에서는 애플과 다른 기종을 모두 교육용으로 사용했다.

이와 반면에 우리나라는 컴퓨터 초창기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앞에서 열거한 어느 나라보다도 경험곡선이 적었고 정부 관료들마저 컴퓨터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무엇인가를 해야 하다는 사명감은 있었다. 개인 사용자들은 애플 II의 클론과 일부 일본 제품을 사용했으나 학교에서는 교육용 컴퓨터가 따로 있었다. 대기업들에게 적절한 수요를 만들어 주어야 컴퓨터 개발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성전자 FC80U MSX

당시 8비트 시장은 금성전자의 FC시리즈, 삼성전자의 SPC, 대우전자의 MSX 등 세 가지 규격으로 나뉘어 있었다. 금성전자의 FC시리즈는 금성이 시장에서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단명했다. 당시에 교육용으로 초등학교마다 의무적으로 컴퓨터 교실을 두고 일정 수 이상의 컴퓨터를 구매하도록 했다. 당시에 정부 입찰시장에서 금성과 대우는 삼성보다 낮은 입찰가를 써내 교육용 컴퓨터시장에서만큼은 대우의 MSX와 금성의 FC시리즈가 우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금성이 서둘러 8비트 PC시장에서 철수하자 많은 수의 FC 컴퓨터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MSXSPC가 경쟁했다. 삼성의 SPC는 일본의 거대한 소프트웨어시장이 뒷받침 된 MSX(MSX는 미국의 MS와 일본의 아스키가 세계의 PC 환경을 통합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만든 8비트 통일 규격으로 1983년에 기본 규격이 발표 되었다. 일본 업체들은 MSX에 활발하게 참여했다.)보다 호환성이나 소프트웨어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삼성 자체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부서를 마련하는 등 그룹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국내 시장은 대우전자와 삼성전자의 대결구도가 되었는데 당시 시장경쟁 여파는 지금도 얘기될 정도로 치열했다. 이 같은 양사의 경쟁의 이면에는 컴퓨터가 미래의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결국 교육용 컴퓨터시장에서의 승리는 교육용 테이프와 카트리지를 공급하고 오락용 패키지가 일본에서도 많이 개발된 MSX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요가 계속 줄어드는 삼성전자의 SPC 시리즈는 얼마 뒤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킬러 앱스

다시 조금 앞의 얘기로 돌아가 보면 중요한 전환점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는 컴퓨터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다. 사람들이 절실하게 원하던 것이 무엇인가도 중요한 관점이다. 초기의 컴퓨터들이 부닥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특별히 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쓸 만한 컴퓨터가 있어도 사람들이 그것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그전까지는 컴퓨터를 가지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열망이 에너지였다면 컴퓨터가 흔해지자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새로운 에너지를 모으는 배수구와도 같은 기능을 했다. 교육용 컴퓨터시장은 학교에 설치되더라도 특별히 재미있거나 유익한 무엇이 없는 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킬러 앱스, 흔히 카테코리 킬러라고 하는 걸출한 무엇이 나오면 시장은 석권되고 경쟁자들은 숨을 죽인다. 킬러 앱스가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간에 그 애플리케이션이 나와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최초의 킬러 앱스를 보통 비지캘크로 보지만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필자는 퍼스널컴퓨터로 무엇인가를 할 것 같은 힘을 준 BASIC 인터프리터가 최초의 킬러 앱스라고 생각한다. 물론 마이크로컴퓨터의 세계 그 자체가 킬러 앱스지만 말이다.

시장은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시작되었다. 특별한 강자는 애플 정도이고 그나마 완전 잠식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고 얼마 후 IBM PC의 도전을 받게 된다. 하지만 8비트의 퍼스널 컴퓨터 시장은 애플, CP/M 호환기종 그리고 기타 퍼스컴으로 양분되어 자신들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애플 II 에서는 비지캘크라는 제품이 나왔다. 애플 II가 우수해서 애플이 주 플랫폼이 된 것도 아니었다. 개발자인 댄 부루클린(Dan Bricklin)이 빌릴 수 있던 컴퓨터가 애플 II였기 때문이다. 비지캘크는 최초의 스프레드쉬트였다. 스프레드 쉬트가 쓸 데가 많아지자 갑자기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던 8비트 퍼스널 컴퓨터시장이 점차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지캘크를 사용하려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MSX의 킬러 앱스는 어떻게 보면 게임이 킬러 앱스였다. 나중에는 국내시장의 70%, 일본시장의 50%가 MSX였다.

WordStar for DOS
dBase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시장은 이렇게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 시장이 커지자 주변기기의 시장도 열렸다. 프린터나 모뎀과 같은 주변기기부터 시작하여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와 다른 상품들이 갑자기 대량으로 팔리리 시작했다. 워드 프로세서시장에서는 CP/M워드스타가 나타났고, 데이터베이스시장에서는 dbase II와 같은 카테고리 킬러들이 나오면서 시장은 나름대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컴퓨터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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