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6/88에서 80286까지
8086/88에서 80286까지
시장의 변화와 관성의 법칙 -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10)
최초로 구현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이 아닌 다른 회사로부터의 주문에 의해 우연히 탄생하였다. 그 이전에도 페어차일드에서[마이크로 컨트롤러의 특허를 신청한 사람이 있었으나 실제로 구현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는 8080과 8085 그리고 Z80같은 인텔과 호환되는 CPU가 시장을 점유했다. 8080의 발표이후 이른바 퍼스널 컴퓨터라고 부르는 개인용의 마이크로컴퓨터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다. 수백 개가 넘는 컴퓨터 회사가 너도나도 이들 개인용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8080계열이 아니면서 시장에서 비교적 우세한 점유율을 갖던 회사는 애플과 아타리 그리고 코모도어가 생산하던 퍼스널컴퓨터에 탑재된 6502를 생산하던 모스텍으로 6800의 변형판에 가까운 설계를 구현했다. 인기가 있던 Aplle II에 사용된 6502를 제외하면 인텔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텔칩의 사용에 익숙해진 덕분에 다른 좋은 칩이 발매되어도 사람들은 계속 인텔의 CPU를 사용했다. 인텔칩의 개량판인 Z80이 인텔 8080의 명령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사람들을 인텔의 영향권에 묶어 놓는데 일조했다. Z80을 만든 사람들 역시 인텔로부터 독립한 설계팀이었다.
CPU 뿐만 아니라 주변 칩들의 사용법도 한번 익숙해지면 그 사용의 관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관성의 방향을 바꾸려면 그 관성만큼 크거나 때로는 몇 배나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초창기가 지났지만 1980년대에도 많은 책들과 잡지에서 8비트의 인텔칩을 소개했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선택의 다양성이 적은 이유로 그 다음에는 점유율이라는 마술적인 힘에 의해 인텔의 칩들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목차 |
인텔 8080
몇 개월 늦게 나온 이유로 모토롤라의 6800은 설계구조가 우수하고 성능 좋은 프로세서인데도 불구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이미 1970년대에도 많이 찍으면 싸게 팔 수 있었고 가격을 조종하는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시장을 장악한 것은 인텔이었다.
퍼스널 컴퓨터를 제외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또 다른 큰 시장은 단말기 시장이었다. 초기의 단말기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미분화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니컴퓨터나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단말기를 통해 계정을 얻어 사용하는 것으로 독자들이 리눅스나 다른 운영체제에 텔넷으로 접속하여 사용자 계정에서 작업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이다. 그전까지 단말기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아니라 수많은 로직 게이트로 만들어져서 지능이 떨어지는 이른바 멍텅구리 단말기(Dumb terminal)라고 불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dumb 터미널을 사용하고 있던 단말기 시장을 석권했다. 단말기가 비디오 형태로 나오기 이전에는 텔레타이프라이터(TTY : Tele TypeWriter - 요즘도 유닉스에는 /dev/tty가 있다)를 사용했다. 텔레타이프라이터의 자판에 글씨를 쓰면 이 글자들은 바로 그 앞의 종이에 한 글자씩 인쇄가 되고 오늘날의 리턴 키에 해당하는 캐리지 리턴(CR: Carriahe Return)을 치면 줄 바꿈이 일어나고 인쇄용지가 앞으로 전진했다(LF: Line Feed ). 이 방식은 많은 논란이 있어서 요즘도 MS-DOS 형태의 텍스트 파일은 줄 바꿈이 일어나는 부분에서 CR-LF가 같이 존재하고 유닉스들은 CR문자만이 있다. 윈도 XP의 노트패드는 아직도 CR만 있는 문장에서 줄 바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무리 긴 유닉스 텍스트도 1줄로 나온다.
당시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수많은 단말기업체들이 텔레타이프라이터를 모니터에 구현하면서 많은 기능을 첨가하여 구현하다보니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NetTerm이나 텔넷의 단말기 에뮬에이션의 인터페이스 선택이 혼란스러운 것은 이들 업체가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새로운 기능을 부가하면서 서로 다른 표준을 냈기 때문이다(하이텔을 이야기 프로그램으로 사용하던 시절에도 단말기를 선택해야 했다).
시장이 초창기였으므로 요즘의 표준위원회 같은 것은 아예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때였고 성공적인 업체의 상품이 바로 표준이었다. 사실상의 업계 표준(defacto standard of industry)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표준이 생긴다는 것은 그 이전에 치열하게 싸우던 다른 업체의 소멸과 시장이 새롭게 정리됨을 의미했다. 텔넷 프로그램의 표준모드인 VT-100이나 VT-220 아니면 Hazeltine 같은 것은 당시의 유명했던 단말기의 상표명이며 특정 단말기를 텔넷이 흉내내는 것이다. 텔넷의 수많은 단말기 모드는 과거의 잘 나갔던 모델의 상표명인 경우가 많다. 수요가 거대했던 단말기를 만드는 업체는 돈을 많이 벌었고 하룻밤 사이에 떼돈을 벌고 유명해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에 갑자기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마이크로컴퓨터 업체는 시장이 커지고 점유율 경쟁이 일어나면서 중요한 몇 개의 업체와 중요하지 않은 수백 개의 업체로 구분되었다. 단말기 업체들은 자연스럽게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그 주변 칩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IBM같은 회사도 있었고 IBM의 엔지니어들이 단말기에서 인텔의 주변 칩을 사용했던 이유가 나중에 PC산업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칩을 계속 사용하는 습관이 IBM에서 인텔의 8088/86을 IBM PC에 채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사실 초기의 PC는 하드웨어 수준에서 단말기와 별다른 차이도 없었다.
PDP-11
시장이 커지다 보니 70년대 말엽에는 몇 개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이크로컴퓨터 업체나 CPU를 생산하는 업체들도 마차가지로 중대한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 시장의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능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른바 <예정된 전쟁>이 모든 메이커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텔과 모토롤라 자일로그같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업체는 모두 성능이 뛰어난 16비트 프로세서가 앞으로의 시장장악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장이 성숙하면서 미니컴퓨터 업체가 이미 경험했던 중요한 변수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통일적인 버스 시스템과 운영체제였으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참여한 엔지니어들은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같은 미니컴퓨터 업체의 엔지니어들처럼 체계적인 관점을 갖지는 못했다. DEC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도입되기 힘든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70년대 말엽 DEC는 미니컴퓨터 세계에서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로 군림하면서 PDP 시리즈와 VAX 시리즈를 개발하고 있었다.
인텔의 4004와 8008은 PDP-8의 영향으로 설계된 것이며 이제 프로세서 업체들은 성능향상을 위해 PDP-8의 상위 기종인 PDP-11과 유사한 기능을 갖는 컴퓨터가 필요해 질 것을 알고 있었다(VMS와 유닉스의 개발도 PDP-11에서 중요한 가닥이 잡혔다. PDP-11은 이미 70년대에 MMU를 완전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8비트 퍼스널 컴퓨터의 열풍의 산실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메모리 공동체 역시 PDP-8의 사용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DEC에서는 퍼스널 컴퓨터 시장은 무시하고 있었다. 미니컴퓨터에서 충분한 시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DEC의 창업자이자 CEO인 Ken Olsen은 많은 비전과 기술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엔지니어 출신이었지만 정작 퍼스널 컴퓨터 시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그의 유명한 예측은 크게 빗나갔기 때문에 아직도 인용되고 있다. (“개개인이 자기 집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켄 올슨, 1977년) 켄 올슨은 공개석상에서도 퍼스널 컴퓨터에 대해서 계속 무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DEC는 1980년대 후반까지 다른 PC가 추구했던 중요한 기술을 이미 1970년대에 확보하고 있었다. 32비트 프로세서 , VMS 운영체계(VMS는 나중에 Windows NT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둘 다 초기의 주 설계자가 David Cutler로 동일 인물이다.), 주변장치 인터페이스에 대한 기술과 버스에 대한 통찰력 같은 것이다. 물론 개발 언어도 확보하고 있었다. 필자는 DEC의 중요한 엔지니어였던 고든 벨(Gordon Bell)의 문서들을 읽으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http://research. microsoft.com/users/GBell/) 1970년대의 미니컴퓨터의 수준이라는 것이 결코 낮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고급 기술들은 다시 PC업체들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로 발명되었다. DEC는 90년대 후반에 컴팩에 인수되었다.
어린 시절의 빌 게이츠는 켄 올슨을 컴퓨터 업계 최고의 영웅으로 생각하며 자랐다고 회고한다. 빌 게이츠도 13세 부터 PDP-8을 사용하며 컴퓨터에 입문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PC업계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을 1979년 DEC의 PDP-11을 모델로 한 퍼스널 컴퓨터가 나왔을 때와 80년대 유닉스 기반의 저렴한 퍼스널 컴퓨터가 나올 뻔했던 시기를 꼽았다. 이 컴퓨터들에 이미 구현되었던 우수한 소프트웨어들이 쏟아져 나오면 퍼스널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업계는 시장에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IF 문장이 없다고 하지만 DEC가 조금만 적극적이었다면 시장은 분명히 이상한 방량으로 개편되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발전들은 새로 퍼스널 컴퓨터를 구매하려는 고객들과 조금 덜 세련되긴 했지만 저급의 기술로 시장을 따라가는 엔지니어들 사이의 틈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많은 것들이 다시 발명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커다란 대세를 따랐기 때문에 이 시장은 세련된 것도 아니었고 최고 성능의 기계를 통해 구현된 것도 아니었으나 질적 양적 측면의 거대한 발전이 일어났다.
국방성이나 연구소에 몇 대의 비싼 기계를 파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팔아야 하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기술의 수준보다는 기술의 성격이 다른 일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비즈니스를 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선택은 논리적인 판단과 잘 맞지 않았다. 시장의 점유율이라던가 가격과 같은 미세한 요소들이 사람들의 호응과 기대에 맞추어가며 흥행사업처럼 진행되는 과정이 프로세서업체와 컴퓨터 제조업체의 성패를 판가름하게 되었다. 기술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시장의 상항으로 보아 마케팅과 환경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만이 살길이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았고 이상한 것들을 원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시장은 성숙을 거듭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성능보다 더 좋은 성능의 기계를 갖게 되었다. 컴퓨터 업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안팔릴 것이고 천하 없는 엔지니어나 기획가들도 망해가는 회사를 떠나게 된다.
8088/8086 그리고 68000
8080의 설계와 생산이 우연하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 다음의 발전도 어떤 기획을 따른 것도 아니었다. 8080을 발표한 인텔은 몇 개월 후 모토롤라가 8080보다 성능이 더 좋은 6800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일의 배후에는 빌 래틴(Bill Latin)이라는 모토롤라의 엔지니어가 있었다. 빌 래틴은 버클리 대학에서 앤디 그로브의 강의를 듣던 제자로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가진 엔지니어였다.
인텔은 이 엔지니어를 데려오기 위해 1971년부터 섭외를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위협을 가하고 한편으로는 회유하기를 거듭하면서 래틴을 포섭하였으나 이미 래틴은 모토롤라 내부에서 메모리와 반도체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뛰어난 칩을 만드는 것으로 입증하였고 인텔에는 합류하려 하지 않았다. 래틴이 인텔에 합류하게 된 것은 1973년경의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경기로 인해 모토롤라 내부의 정책이 바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회사는 인원의 감축과 재배치를 요구했고 결국 인원의 감축이 일어나자 자신을 따르던 엔지니어들과 함께 인텔에 합류했다. 인텔에 합류하면서 자신의 관리인원은 300명에서 5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8800(iAPX 432로 알려져 있는 ) 강력한 개념의 혁신적인 프로세서의 설계를 맡게 되었다. 8800이 너무 많은 기능을 구현하면서 프로젝트가 지연되고 있을 무렵 인텔에서는 다른 회사와 경쟁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이때 빌 데이비도우(Bill Davidow)라는 새로 영입된 마케팅전문가가 인텔이 다른 회사와 경쟁할 수 있는 기반과 시간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당시 인텔에서 분사한 자일로그는 Z-8000의 설계에 들어갔으며 모토롤라는 68000이라는 새로운 프로세서의 설계에 돌입했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인텔에는 8085라는 8비트 프로세서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8085는 8080에 약간의 개선안을 도입한 것이다. )
메모리가 주력 상품이던 인텔의 내부에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회사의 대외 이미지만을 개선할 뿐이며 영업상의 이익은 거의 없으니 잘하는 일에 집중하자는 논리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978년경 인텔]]은 EPROM만 해도 5년간의 주문을 받아 놓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머지 메모리들도 정도가 덜하긴 했지만 공굽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일단 데이비도우는 이러한 논란을 종식시켰다. 프로세서가 중요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데이비도우는 시간을 너무 끌고 있던 일단 8800에 대한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당시 근무한지 1년 정도밖에 안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의 스티브 모스(Steve Morse)에게 8800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시키기로 했다. 60페이지 가량의 문서에는 인텔이 많은 것을 투자한 8800의 성능상의 문제점과 실제 생산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집중적으로 적었다. 인텔이 당시로서는 많은 금액인 6000만 불을 설계에 투자한 8800칩에는 상용화를 가로막는 수십 개의 문제점들이 있었다(나중에 8080의 주 아키텍트인 스탄 마조르(Stan Mazor)는 이 칩의 설계가 시대를 너무 앞질러 나왔다고 평가했다). 모스와 다비도우는 인텔이 많은 것을 투자한 이 칩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1976년 4월에 8800에 대한 회의가 열리고 회의장에서는 담배연기와 고함소리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2시간 동안의 회의의 결정은 아무튼 1년 이내에 새로운 16비트 칩을 생산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년 내에 칩을 생산하려면 10주안에 16비트 CPU의 주요 설계를 마쳐야 하고 이 결정으로 테리 옵덴디크(Terry Opdendyk)라는 엔지니어가 이끄는 설계팀에게 10주 만에 칩의 기본 설계를 마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기본 설계 이후에는 세부적인 설계만이 남기 때문에 모든 기본적인 골격이 10주 만에 완료되어야 했다. 설계팀은 10주 만에 칩의 기본 구조를 확정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옵덴디크는 어차피 발표까지의 시간이 절박하기 때문에 10주 만에 설계를 확정하는 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키텍처의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8800의 설계에 대해 회의적인 보고서를 낸 스티브 모스가 도의적인 책임상 기본 설계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문제는 스티브 모스는 기본적으로 하드웨어 디자이너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는 데 있었다. 이런 일은 인텔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만 유리한 점이 있다면 스티브 모스는 프로그래머의 관점에서 칩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1976년 5월부터 칩의 설계에 들어갔다. 옵덴디크는 사람들과의 논쟁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문제를 일으킨 8800은 계속 개발하기로 했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새로운 구조의 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다. 스티브 모스는 새로운 칩의 설계를 8080와 8085에 기초하여 이루어 냈다. 초기 프로세서들이 프로그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냈고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8080에 변경을 가해 16비트로 만들면서 과거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사용된 주변기기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8080을 배우는데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사람들이 아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8080에 대해 몇 개의 레지스터와 20개 정도의 명령어를 추가하고 8080 코드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레지스터와 연산기 그리고 버스를 16비트로 늘린 16비트판의 8080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칩들과 <호환 (Compatible)>가능하다는 신비한 단어가 광고와 데이터 시트에서 등장했다. 가격이 싸지고 있는 메모리를 위한 공간은 64K로는 조금 부족할지 모르므로 4비트를 더하여 64K의 16배인 1M까지 어드레싱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과거의 어드레싱 공간이 64K였으므로 새로운 1M의 공간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 역시 어드레스를 64K의 세그먼트로 묶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세그먼트를 변경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급한 대로 해결하기로 했다. 본질적으로 8080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20비트의 공간은 세그먼트 레지스터의 상위 4비트만을 사용하여 4비트의 쉬프트 왼쪽 쉬프트를 일으켜 20비트를 만드는 것으로 완전히 편법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이유로 80년대 중반 이후로 일반 모드의 프로그램은 메모리와의 전쟁이었다. 메모리의 사용량이 조금만 늘어나도 EMS나 XMS 그리고 High Memory 같은 문제들과 사투를 벌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32비트의 80386/486에서도 MS-DOS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에서도 보호모드의 윈도즈(win32)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프로그래머들을 10여년 이상 괴롭혔다.)
결국 새로운 칩은 1년 정도 지나서 생산되었고 전문가의 눈에는 결점이 많은 엉터리 칩으로 보였지만 사람들은 이 칩을 통해 8비트의 주변장치들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8080코드를 변형한 명령코드로 16비트 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인텔은 과거와의 연계성과 16비트라는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8086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프로세서를 1978년에 발표했다.
이른바 x86이라는 이름의 시작이었다. 인텔의 16비트는 모토롤라나 자일로그보다는 빠르게 시장에 등장했다. 1978년 8086이 시장에 발매되었다. 당시로서는 8086으로 시장을 장악한다는 명백한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다음해가 되자 모토롤라에서 68000이 발매되었다. 6800과 마찬가지로 68000은 8086보다 가격과 성능에서 우세했다. 68000이 발매되자 인텔은 8086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판매가 부진하면 개발장비와 다른 주변 칩들도 판매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텔은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진압작전(Operation Crush)라는 코드명의 작전은 8086의 단점을 감추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는 대대적인 홍보와 영업전략을 펼쳤다.
업계의 선두주자라는 좋은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다양한 제품군과 시스템 통합 수준에서의 성능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직 모토롤라의 칩을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고객층에 대한 고객 서비스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많은 사용자들을 8086과 인텔의 시장으로 묶어 놓았다. 다른 경쟁자인 자일로그의 Z8000은 개발 시간이 지연되면서 출시되긴 했지만 시장의 장악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경쟁관계에 있던 68000은 이미 8비트를 변형한 8086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본격적인 아키텍처를 구현했다. 사용자 모드와 수퍼바이저 모드가 구분되었으며 자일로그의 Z8000과 함께 PDP-11의 영향을 받은 설계로 내부의 레지스터는 32비트이며 내부적으로는 32비트 외부적으로는 16비트의 버스 폭을 가졌다. 선형주소를 사용하므로 8086과 같은 작은 규모의 세그멘테이션에 제한되지도 않았다. 사용법은 다소 어려운 편이었으며 발매 초기에는 주변 칩들의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고 전해진다.
변곡점
68000과 8086의 시장 점유율의 승부는 IBM이 퍼스널 컴퓨터를 설계하면서 8086의 염가판인 8비트 버스폭의 8088을 채택함으로서 벌어졌다. IBM PC 역시 초기 시장에서의 성공이 의심스러웠으나 IBM의 호환기종이 염가에 보급된 것과 몇 개의 중요한 킬러 어플리케이션이 등장하고 나서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자 CPU 시장의 판도는 인텔에게 유리해졌다.
IBM PC는 1980년대 당시 회사의 영업담당 이사였던 돈 에스트리지(Don Estridge)에 의해 기획되었다. IBM PC에 8088이 채택된 이유는 논란이 분분하다. Intel과 공동으로 버블 메모리를 생산하기 위해 IBM이 인텔칩을 채택했다는 설도 있고 IBM PC의 기초 설계를 제공한 디스플레이 라이터라는 IBM의 단말기 제품이 8086 베이스였다는 설도 있으며 원래는 8비트로 설계되었다가 16비트로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68000의 채택도 고려하였으나 평가기의 제작이 몇 개월 늦어져 불가피하게 인텔의 8088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IBM의 PC개발팀으로서는 개발 시한에 맞추고 회사내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프로세서와 운영체제를 모두 외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인텔과 MS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게 되었다.
68000은 비슷한 시기에 애플의[LISA에 사용되었으나 LISA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LISA 역시 처음에는 먼저 시장에 나온 8088을 고려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68000을 선택하였다. LISA의 후손인 매킨토시 역시 68000을 탑재했다. 가격 문제로 매킨토시에는 8비트인 6809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성능 문제로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이시기의 IBM PC가 아닌 경쟁기종(Amiga, Atari 그리고 매킨토시)들은 68000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의 워크스테이션인 Apollo, Sun 그리고 NeXT과 나머지 워크스테이션들도 모두 68000을 채택했다. 아무튼 성능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면 당시에는 68000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일반인들은 IBM의 명성과 저렴한 가격에 이끌려 IBM PC를 그리고 CPU는 인텔을 선택하였다. CPU 시장은 8086/88과 68000으로 양분되었다.
1980년 빌 래틴이 주도하던 8800이 IAPX 432라는 이름으로 1980년 발표되었으나 처음에 예상되었던 것처럼 너무 느려서 실제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아키텍처는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8086은 이 칩이 나올 때까지의 대용품으로 고려되어 급조된 것인데 정작 8800은 사장되고 말았다.
매킨토시의 광고에서 Garden Variety of 8bit CPU라고 놀리던 8086 (사실상 8085와 다른 점도 없었다. 확장된 4비트의 어드레스는 나중에 MSX나 다른 8비트 컴퓨터에서 8255 IO포트를 통해 확장작업을 하기도 했다. 대략 그 정도의 뻔한 변화였다.) 빠른 8비트 정도의 16비트 CPU 그것도 8비트 버스를 갖는 8088이 IBM PC의 주력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IBM PC를 더 많이 사용했다. 심각한 응용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인텔은 8088의 라이선스를 여기저기 나누어주고 있었다. AMD, 지멘스, NEC 기타 여러 회사에서 8088이 생산되었다. 클록은 초기의 4.77MHz에서 조금 빨라져 10MHz 대에 이르렀으나 큰 변화는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미세한 요소들이 미래의 업(karma)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시장은 16비트와 32비트에 이르면 더 혼란스러워지면서 수요의 폭증과 본격적인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는 항상 현재에 의해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술이 아닌 요소들이 인텔의 편을 들어주었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컴퓨터 [200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