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프로세서와 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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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프로세서와 클론들


마이크로프로세서전쟁(9)


개인용 컴퓨터 산업은 인텔에서 만든 8080 CPU와 DRAM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라는 잡지에 MITS에서 만든 알테어 컴퓨터가 소개되며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폭발적으로 팔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역사가 인텔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인텔의 8비트 프로세서는 자일로그의 프로세스에 비해서도 적게 팔렸고 성능도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모토롤라의 CPU들보다 덜 체계적이었으며 버스나 인터페이스도 대단치 않았다.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16비트로 들어와서는 68000이나 다른 프로세서에 비해 더 열세에 몰리기 쉬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8088은 우여곡절 끝에 IBM PC의 주력 CPU가 될 수 있었다. 68000은 매킨토시의 주력 프로세서가 되었다.

하지만 인텔은 IBM PC의 주력 프로세서가 될 수 있었고 판매 경쟁은 다른 회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자사 제품의 클론에서도 발생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인텔의 칩을 클론한 프로세서들이 나타나서 같은 아키텍처로 경쟁했다. 사실 인텔과 다른 경쟁자들의 경쟁은 386이 나올 때까지는 대등했다고 볼 수 있었다.

80286까지는 인텔의 라이선스를 받은 다른 업체들의 CPU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고 인텔도 이런 상황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80386이 나올 당시만 해도 반도체 업계의 시장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다가 더 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났다. 그만큼 80386은 인텔의 자금줄이었고 다른 업체의 클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목차

80386

메모리 업체였던 인텔이 일본 업체들에 의해 메모리의 비교 우위를 빼앗기고 메모리 시장에서 스스로 퇴출을 결심할 때까지 인텔 내부에서는 메모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 업체는 다시 한국과 미국의 마이크론 제품과 경쟁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자 한국의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메모리 사업은 첨단의 생산/설계기술이라기보다는 수율로 승부하며 가격 싸움이 첨예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로 변경되었고 대량 생산이 필요했기 때문에 점차 컴퓨터 산업의 ‘쌀농사’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쌀농사를 지으면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이윤이 높은 장사는 아니다. 메모리의 주문이 몇 년 치씩 밀리고 이윤이 높던 초창기의 호황시대는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386은 인텔이 메모리를 포기할 당시 나온 제품이었다.


대안

1985년과 1986년 메모리 시장의 강자 인텔은 큰 적자를 내고 과연 존립이 가능할 것인가를 걱정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수천 명의 직원이 해고되었다. 인텔의 경영진들은 1986년을 보내면서 최악의 해가 끝나는 것을 감사히 여길 정도였다. 이때를 전후해 인텔은 메모리 산업에서 손을 떼는 대신 그해에 80386이 발매되면서 인텔은 기적적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홀대받던 존 크로포드의 팀에 의해 만들어진 80386에 의해 인텔은 이듬해에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그 후 수년간 인텔은 80386에 대해 독점적인 가격을 행사했다.

Intel 80386 16MHz

16MHz의 80386. 얼마 후 개선되어 20,25,33 MHz 버전이 나왔다. 이 프로세서로 인해 PC의 역사는 새로 쓰여 져야만 했다.

사실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가격과 성능으로 인텔의 80386과 맞설 수 있을 규모라든가 기술력 그리고 마케팅 측면에서 어느 정도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던 회사는 사실상 모토롤라밖에 없었다. 다른 칩들은 지명도가 높지 않은 신생 회사의 제품이거나 회사의 명망이 있어도 너무 성능이 떨어지는 관계로 32비트이긴 해도 실용화할 수 없는 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Great Microprocessors of the Past and Present'에 따르면 모토로라의 16비트 버전인 68000은 PDP-11이 LSI화된 LSI-11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제품이었다고 한다. 32비트로 넘어오면서 모토로라는 MMU(Memory Management Unit)가 없는(CPU 외부에 따로 MMU 칩을 추가해야 하는) 32비트인 68020을 첫 모델로 내놓았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와 애플의 매킨토시 기종에서 이들을 채택했다.

그 후속타인 68030은 파이프라인을 갖추었고 MMU를 내장했다. 68040은 486처럼 부동소수점 처리기(FPU)를 내장했다. 80×86과 680×0으로 표기되기도 했던 두 칩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경쟁은 이미 상대적으로 많은 보급이 이루어진 인텔의 ×86에 유리했다.

회사가 어려운 상태였던 인텔은 PC 제조자들이 빠른 시일 내에 32비트 기반의 PC와 워크스테이션을 생산할 수 있도록 IBM을 위시한 제조업체들을 지원했고, 결국 컴팩이 32비트 데스크프로를 생산하며 32비트 데스크 탑 컴퓨터의 시작을 알렸다.

컴팩의 데스크프로는 폭발적으로 팔려나갔고 컴팩은 대기업이 됐다. 컴팩의 발표가 있은 지 얼마 후부터 다른 PC 호환업체들의 386보드 생산이 줄을 이었다. 책상 위의 고급 PC로써만 구현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 V나 Mach 같은 중요한 유닉스의 구현도 이들이 생산한 보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고급 데스크 탑과 워크스테이션의 경계는 32비트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애매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32비트는 나름대로 빠르게 발전했다. 80년대 후반 필자는 포트란 프로그램을 386에서 수행시키고 커피를 마시며 계산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줄을 서있던 기억이 있다. 2년 후에는 가격이 많이 떨어진 386DX25를 간신히 한 대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486을 구입하고 386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그 다음 해에는 펜티엄을 구입했다. 다시는 PC 업계의 빅뱅이 일어났고 CPU가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좋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32비트 프로세서가 큰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업체들은 80386의 클론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27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386은 당시로서는 매우 복잡한 칩에 해당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86의 클론을 독자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업체나 연구소가 몇 개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무튼 AMD는 80386의 생산 후 얼마 후부터 Am386이라는 80386과 호환되는 칩을 생산했다. 인텔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독주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AMD 386

AMD의 386 호환 프로세서. 인텔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프로세서로도 다 할 수 있었다. 가격은 쌌으며 보드를 바꿀필요도 없었다.

Am386이 나온 이후로 더 이상 인텔은 시장을 독점할 수 없었다. Am386에 대한 법적 대응과 제소가 이어졌으나 법정은 Am386의 생산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이후부터 분명히 독자적인 IA-32 호환구조를 지닌 저렴한 대안이 제시되었다. 얼마 후 사이릭스나 다른 업체들로부터도 클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텔은 486부터 대안을 강구하다가 펜티엄에 이르러서는 이들 업체를 잠시 따돌리는 듯 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펜티엄과 같은 소켓을 쓰고 성능이 유사한 칩들이 다시 발매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인텔의 제소에 의해 펜티엄 II부터는 인텔 칩들과 장착 소켓은 호환되지 않으면서 명령어는 호환적인 고성능 프로세서들이 다시 경쟁 회사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들이 판매 면에서 인텔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나 어느 정도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작은 생태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대안적 선택의 중심에는 AMD가 있었다. 대안이 생기면서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조금은 더 넓어졌고 황당하게 책정될 수 있는 가격의 횡포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대안과 자유는 동의어가 아니지만 대안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 하나의 속박이다. 어떤 사람들이 인텔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같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회사들에 알려져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대안들이 자꾸 없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실제로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인텔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AMD를 여러 차례 공격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텔의 최고 경쟁자는 다른 아키텍처가 아닌 인텔의 아키텍처를 갖고 있었다.


AMD 8088.jpg

AMD의 8088 프로세서. 초기부터 AMD는 꾸준히 인텔과 호환적이었다. AMD 버전의 8085, 8080도 있었으며 80286도 있었고 80386, 486도 있었다.

AMD의 탄생

AMD는 인텔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다. 1968년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업멤버이자 반도체 업계의 스타였던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회사를 떠날 무렵에는 페어차일드에 관련되어 있던 많은 기술 인력들이 반도체 회사를 창업했거나 창업하려 하고 있었다. 공백이 되어버린 페어차일드는 어쩔 수 없이 모토로라로부터 레스터 호건을 영입했다. 초고액의 연봉과 스톡옵션을 보장받고 노이스와 무어를 괴롭혔던 회계 상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대우는 그 후 실리콘 밸리의 스타급 임원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레스터 호건은 취임하자마자 회사의 최고 관리자들을 전부 해고하기 시작했는데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제리 샌더스라는 회사의 마케팅 담당이사였다. 샌더스는 페어차일드의 영업사원 시절에 초기 가격이 100달러이던 1211이라는 트랜지스터를 군수용으로 소량이지만 고가인 150달러에 팔아서 회사를 놀라게 한 적도 있고 얼마 후 저렴한 1달러짜리 진공관이 출시되자 같은 트랜지스터를 1/100도 안 되는 1.05달러에 대량으로 팔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회사가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맞출 수 있다고 우겼다고 한다.

알콜 중독이 있던 기계공 출신의 아버지가 술에 절어 지내는 동안 싸구려 임대 아파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샌더스는 어린 시절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던 일리노이 대학 시절 풋볼 경기가 끝나고 패싸움 도중 턱뼈와 코가 부러지고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후 영화배우의 꿈을 접고 더글라스 항공사에 엔지니어로 들어갔다.

항공기의 에어 컨디션 설계를 하던 샌더스는 얼마 후 전자산업이 태동하자 자신이 마음속으로 바라던 화려한 생활을 하려면 많은 돈을 받는 전자부품 영업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페어차일드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잘 생긴 외모와 화려한 화술의 수완가였던 그는 페어차일드에서 고속 승진했다.

얼마 후 회사 마케팅 부문의 최고 책임자가 된 샌더스는 실리콘밸리로 옮겼다. 헐리우드에 대 저택을 마련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던 샌더스는 전자산업 이외에도 영화와 음반사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조지 길더는 ‘마이크로코즘’에서 샌더스의 특이한 성향이 성장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고 적고 있다. 정체 모를 미인을 동반하고 회사의 기공식에 나타나기도 했고 오로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주식지분을 팔아 치우면서도 저돌적인 경영을 했던 특이한 인물인 샌더스의 이야기는 조지 길더의 책에 자세히 나온다).

이런 생활은 호건이 페어차일드로 오면서 점차 불안하게 됐다. 호건은 너무 인력이 많다는 이유로 샌더스를 해고했다. 샌더스는 몇 주를 쉬면서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해 보고는 페어차일드의 최고 영업사원이었던 에드 터니에게 반도체 사업을 해보자고 권유했다. 8명의 창업멤버가 모아지고 캐피털 그룹에서 이들의 매니저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신생 기업인 인텔에 돈을 투자한 아서 록을 만났다.

상세한 사업계획서를 들여다 본 아서 록은 너무 많은 반도체 회사가 생겼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를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이야기했고 샌더스가 기술자가 아닌 마케팅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시간이 지나도 투자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샌더스가 처음 접촉한 아서 록은 이른바 벤처 캐피탈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페어차일드마저도 아서 록의 투자 모집으로 창설되었다. 샌더스는 업계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은 투자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한다).

샌더스의 사업계획서는 인텔의 창업자 밥 노이스의 관심을 끌었다. 이 회사가 만들고자 하는 반도체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며 결국 인텔의 경쟁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는 사실도 꿰뚫어 보았다. 제품의 이면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노이스는 이 회사가 신제품 개발과 생산보다는 영업에 더 강하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노이스는 AMD가 인텔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지만 약간의 모험을 즐기기로 했다. 노이스는 AMD에 대한 최초의 창업투자가가 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AMD의 모금 캠페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AMD 창업자 제리 샌더스

AMD는 150만불 가량을 목표로 모금을 했고 마지막 날까지 목표액에는 조금 미달된 상태였다. 벤처 캐피탈과 약정된 규모에 조금 미달되는 금액이 모였으나 마지막 5분전 한 투자자의 송금으로 간신히 자금 모집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1969년 6월에 AMD가 창업되었다. 인텔의 경우 투자자들이 사업계획서조차 읽지 않고 노이스와 무어가 만드는 회사이기에 곧바로 투자하겠다고 나선 것과는 대조적인 출발이었다.

초기 약 5년간은 주로 특별한 신제품이 아닌 다른 메이커의 복제품 반도체를 생산했고 제품특성을 약간 개량해 부가가치를 높였다. 마케팅은 매우 순조로웠고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AMD의 첫 제품은 첫해에 발매된 Am9300라는 시프트 레지스터였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서야 회사의 첫 고유 제품인 Am2501이 나왔다.

AMD는 저가격에 고성능 클론 칩들을 대량생산하는 마케팅을 시작했다. 일종의 마케팅 슬로건인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라는 개념의 첫 시작이었다. 그 ‘좋은 제품’이 반드시 AMD가 오리지널일 필요는 없었다.

인텔의 프로세서들은 AMD가 말하는 좋은 제품 전략의 타깃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몇 번에 걸쳐 인텔의 오리지널과 AMD가 호환제품을 만들고 다시 소송이 붙는 이야기를 적을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1세기가 되어서도 계속 진행된 싸움이다. 이 경쟁의 수혜자는 소비자들이었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었고 새 프로세서가 나오면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격이 곧바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속도 경쟁이 붙어 더 빠른 프로세서가 계속 발표되었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컴퓨터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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