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혁명기와 80386의 보급
CPU 전쟁, 인텔의 승리 비결「절반은 우연」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 ③ PC혁명기와 80386의 보급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 아마추어 커널 해커 ) 2004/01/27
인텔의 경영자들은 80386에 대해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차세대 칩이 나올때까지만 시간을 벌어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임시 프로젝트는 인텔에 중요한 계기이자 PC 산업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한송이 꽃에서 나는 천국을 본다"라고 말했던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The Tyger)'는 양을 만든 창조자가 호랑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블레이크에 따르면 같은 재료와 섭리로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한다. 양과 호랑이의 아키텍처는 다르지만 이들은 사실상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증식(proliferation)
인텔의 386을 만든 실리콘과 같은 시기에 나온 다른 회사의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같은 실리콘으로 비슷한 제조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진화 계통이 다르다. 386과 그 후손들은 널리 퍼졌고 다른 칩들은 그 만큼 번성하지 못했다. 386의 클론과 그 후손들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개인용 컴퓨터의 90% 이상이 x86의 기반에서 운영되는 셈이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우점종의 출현인 것이다.
물론 다른 칩 제조자들도 자신의 칩들을 포기하지 않고 소량이긴 하지만 계속 칩을 생산하고 있다. x86과 매킨토시의 파워 아키텍처를 제외하면 다른 칩들의 수요는 더욱 줄어들어 일부는 MIPS나 ARM처럼 아키텍처를 과감하게 단순화시킨 후 임베디드 시장을 타겟으로 삼게 되었다.
필자는 2회에 걸쳐 급하고 이상하게 급조된 x86 중심의 역사를 기술했다. 많은 우연에 의해 x86 계열은 성장했다. 작은 저기압에 의해 이루어진 작은 구름 같던 4004는 80386에 이르러 거대한 적층운처럼 컴퓨터 산업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Great Microprocessors of the Past and Present'라는 제목의 CPU 역사(비교해부학적 역사)를 다룬 사이트(http://www3.sk.sympatico.ca/jbayko/cpu.html)는 거의 모든 CPU를 다루고 있다. 이 사이트의 글에서는 x86의 융성을 'The Great Dark Cloud Falls : IBM’s Choice'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정말로 w:IBM의 우연이 가미된 선택의 순간 이후 다른 우연과 겹치며 x86은 XT, AT를 거쳐 386을 채용한 PC를 내놓게 되고 결과적으로 x86의 대증식을 가져왔다. 얼마 후 거대한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IBM은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 우선 운영체제는 작은 협력 업체에 불과했던 MS가 독식하게 됐다. 80286 시절부터 집요하게 추구했던 OS/2의 부진으로 인해 IBM 은 운영체제에서도 통제력을 잃었다.
둘 다 부분적으로는 시장에 대해 소극적인 접근으로 인한 것이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IBM은 90년대 후반부터 리눅스 운영체제를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나 초기 리눅스 기업에 투자할 때(레드햇 IPO에 대한 A라운드 투자)에는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되살려 매우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1998년에 나온 책인 'Computer Organization and Design'에서도 마구 만들어진 x86 명령의 셋트에 대해 IBM/360의 명령어 셋트와 비교하면서 후세에 컴퓨터 명령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x86 명령어를 조목조목 살펴보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저자인 헤네시와 패터슨이 중요한 초기 RISC인 MIPS와 SPARC의 설계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CISC의 대표주자격인 x86에 대해 공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들의 x86에 대한 평가는 펜티엄 프로가 나온 이후로 많이 좋아졌다(펜티엄 프로에 와서야 인텔은 다른 RISC 칩보다 CISC 구조가 더 느리다는 의혹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RISC도 많은 설계와 구현의 문제에 봉착했다).
이 책의 앞 부분에는 인텔의 존 크로포드의 글이 있는데 크로포드는 80386 개발책임자의 한사람이고 인텔 아키텍처의 주요 담당자였다. 글 중에서 크로포드는 사람들이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추천을 쓴 크로포드의 책에 대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책은 인텔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내용도 많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기술력은 떨어졌지만 많은 돈을 벌어서 계속 실력 있는 개발자를 충원하고 설계를 마무리하였다는 대목이나, x86이 마지막 위대한 CISC이라는 대목도 있다.
파워PC나 DEC의 알파(Alpha) 아키텍처에 대해서도 매우 신랄한 비평이 도처에 나온다. 완벽한 프로세서는 없는가 보다.
인텔은 85년경에 휘청거리다가 80386을 발표하면서 1980년대 말에 가까스로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는데,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뗀 인텔에게는 80386이 유일한 돈줄이었다. 인텔은 초기부터 80386을 독식하기 위한 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당시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는 관리자들에게 인텔을 보물이 가득 찬 성곽에 비유하고 주변에는 보물을 빼앗으려는 괴물들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면서 성의 최고 보물은 바로 80386이라고 설명했다는 일화가 있다.
초기에는 고가 정책으로 판매되던 80386이 얼마 후 저렴한 가격으로 내려오자 386의 급속한 보급이 일어났다. 다시 얼마 지나서는 AMD나 다른 회사들이 법적 투쟁을 벌여 가면서 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80년대에 NEC가 V20/V30 같은 8086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한 클론을 만들면서 원래의 회로나 마이크로코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동작상 호환되는 새로운 칩을 만들었을 때 이러한 일이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인텔은 공식적으로 이들을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도처에서 사람들이 32비트 CPU가 장착된 기계를 갖기 시작하자 컴퓨터를 사용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호에 언급했던 것처럼 대중적인 x86용 32비트 운영체제는 386이 나오고 거의 10년 정도가 지나서야 나타났지만 메모리 사용에 640KB의 한계를 부여했던 DOS 시절에도 XMS와 EMS 등을 동원하는 편법을 사용하면서도 서서히 본격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PC에 새로 구현되거나 이식되기 시작했다. 귀찮기는 했지만 연산속도는 그럭저럭 사용자들이 실전에 사용할 만큼 빨라졌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16비트 모드에서 수행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32비트 프로세서의 속도에 감탄하면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이런 현상은 일부 64비트 운영체제에서 32비트로 컴파일된 애플리케이션이 그 전보다 더 빠르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풀 파워를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